조선말기 성리학자였던 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1792~1868)의 생가가 있는 벽계마을은 서종면 노문리 535번지에 소재하며 주변에 작은 개울을 끼고 산속으로 들어와 있다. 마을의 명칭이 벽계(蘗溪)인 것은 벽진 이씨들이 많이 살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마을에는 이항로 생가 외에도 경기도 기념물 제43호인 노산사(蘆山祠)가 있어 이항로선생의 높은 학식과 유학을 전승하고 있다.
노산사는 벽진 이씨 집안의 것이라기보다 마을 유림의 영당으로 주자(朱子),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 화서 이항로의 영정을 모시고 매년 음력 9월 15일 많은 유림들이 모여 제를 지낸다. 마을의 유림은 노산사를 관리할 뿐만 아니라, 지금도 한학을 가르치고 있다. 또한 노산팔경(蘆山八景)이라 하여 마을 주변에 8가지의 풍경인 제월대(霽月臺), 제월대 시(詩), 명옥정(鳴玉亭), 낙지암(樂志岩), 분설담(噴雪潭), 석문(石門), 쇄취암(鎖翠巖), 일주암(一柱岩)이 있다. 이것은 이항로 선생이 남기거나 이름 지은 것으로 벽계의 주인공은 화서선생이요 ‘화서의 벽계’라고 볼 수 있다.
이항로선생의 조상이 이 마을로 입향하게 된 경위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이항로 선생의 고조부가 이조 참판을 지내면서 그 이전에 살았던 지금의 일산과 파주의 경계지 근처에서 이곳으로 오게 되었다고 한다. 이항로 생가의 건립연대는 안채의 경우 대략 300년 이전에 지어졌을 것으로 추정되며, 사랑채와 가옥 아래에 지어진 강당은 최근에 지어진 것이다.
가옥의 배치는 현재 역‘ㄱ’자형의 안채와 역‘ㄷ’자형의 사랑채가 가운데 담장을 두고 가로로 긴 ‘ㅁ’자 형태를 가진다. 안채의 경우 경기지방의 전형적인 평면에 건넌방인 노산정사와 마루방사이에 부엌을 두고 있어 덧달아낸 형식으로 추측된다. 안방과 웃방의 바깥쪽 뒤란에 툇마루가 있고, 또 대청의 안쪽과 건넌방인 노산정사 전면에도 툇마루가 이어져 있다. 안방의 안쪽과 대청의 뒤편은 쪽마루가 있는데, 이처럼 툇마루와 쪽마루가 많이 나있는 것은 내부 공간과 외부공간의 완충적인 역할을 하기 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현재 안채의 부엌은 잘 사용하지 않고, 웃방을 부엌으로 사용하며, 냉장고는 대청에 두고 사용한다.
안채는 평사량 홑처마 맞배지붕이며, 기단과 주초는 자연석으로 덤벙주초이다. 대청의 중앙부 가구는 고주와 후면 평주에 대량을 걸었고, 낮은 대공을 세워 종도리를 받고 있다. 툇칸은 툇보를 사용하지 않고 처마서까래만 고주와 툇기둥에 걸어놓았다. 사각의 툇기둥 상부는 목침 크기의 보아지와 처마도리가 사괘맞춤으로 결구되어 있다.
사랑채는 문화재로 지정된 이후에 새롭게 지었는데, 예전의 모습인지 새롭게 계획하여 지었는지는 알 수 없다.
가옥의 부엌쪽 뒤란에는 삼량가구의 4칸 규모로 된 초가 한 채가 있는데, 현재 1칸은 변소, 2칸은 광으로 사용하고 있고, 나머지 1칸은 작은 대문간이다. 초가의 뒤쪽에는 우물이 아직 남아 있으며, 식수는 물론이고 우물터에서 물을 담아 그릇을 씻는 개수대 같은 것이 만들어져 있다. 가옥과는 별도로 아래쪽에 지어진 강당은 사랑채를 짓고 난 후에 건립되었다. 강당의 규모는 정면 5칸, 측면 3칸이며 장대석 기단위에 잘 다듬은 원형 초석을 놓고 기둥을 세웠다. 공포는 익공계이며 지붕은 한식기와를 올린 겹처마 맞배지붕이다.
현재 이항로 선생의 직계 종손이 인근마을인 정배리로 이주함에 따라 벽진 이씨 문중에서 선별된 사람이 가옥을 관리하면서 살고 있다.
* 자가용이용 팔당호(북한강) - 양수리 두물머리(물안개, 황포돗단배) - 용늪(연꽃) - 강변도로 - 서종 까페촌 - 노산팔경 - 이항로선생생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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