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책방, 오늘의 문화마당이 되다 |
시치미는 그만 떼야겠다. 여기는 '배꼽마당'. 미술가 배영환의 공공프로젝트 <내일을 여는 책방>(이하 내일책방) 다섯 곳 중 하나다. 내일책방 프로젝트는 전시 형태로 발표한 작가의 제안에 경기문화재단이 사업을 추진하겠다고 앞장서면서 2009년 현실화됐다. 내용은 단순하다. 서가를 넣은 컨테이너 두 동을 문화적으로 소외된 지역에 설치하여 지역의 활력을 도모한다는 것이다. 경기도내 다섯 개 지역에 들어선 책방은 저마다 특색 있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 시흥의 맹꽁이책방, 광주의 솔바람책방, 남양주의 반디책방, 양평의 배꼽마당, 수원의 느리게 읽는 미술책방 등 저마다 지역의 특성과 책방의 개성에 맞추어 이름을 붙였다.
처음에는 책을 읽는 공간으로 시작했지만, 이곳이 단지 도서관의 역할만을 하는 것은 아니다. 내일책방이 지향하는 것은 책을 매개로 한 마을 사랑방이다. 마을 공동체가 책방을 중계소로 삼아 서로 만나고 꾸준히 이야기를 만들어 나가는 것이 책방의 궁극적인 목적이다. 배꼽마당이 자리잡은 정배리는 50여 가구가 듬성듬성 모여 사는 소규모 커뮤니티다. 그 중 20여 가구는 지역에서 계속 삶을 일구어 온 원주민 세대이고, 나머지는 자녀 교육을 위해 이주해 온 젊은 세대로 구분된다. 마을은 생활에 기반을 둔 공동체다. 그러나 농사를 짓는 원주민들과 서울로 출퇴근을 하는 이주민들 사이에는 이렇다 할 생활의 접점이 생기지 않았다. 배꼽마당은 지역 주민들의 다른 결이 서로 만나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대개 이주민으로 구성된 책방 운영진은 마을 사람들과 접촉면을 넓히기 위해 각 집을 일일이 방문하고, 벼 베기 등 농사 일손을 돕는 것은 물론, 정월 대보름 행사를 비롯한 마을 대소사에도 적극 참여했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로 원주민과 이주민 간의 서먹하던 관계는 책방을 매개로 조금씩 풀려나가는 중이다. |
문화로 하나 되다, 서먹함이 사라지다 |
책방 초기에 진행했던 프로그램은 이런 노력과 나름의 성과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마을의 이야기를 그림으로 풀어내는 프로그램에서 아이들은 동네 어르신을 찾아뵙고 말씀을 들은 내용으로 그림을 그렸고, 이 그림들은 탁상 달력으로 엮어져 인쇄되었다. 그 과정에서 아이들은 동네에서 쭈뼛쭈뼛 대하던 어르신과의 관계를 새롭게 조정할 계기를 얻었다. 아이들만이 아니었다. 부모 역시 아이들과 어르신의 중계 역할을 하다 보니 자연스레 원주민과 이주민 간 관계의 양상이 달라졌다. 달력에서 활짝 웃고 있는 어르신들은 어린 시절 별명부터 무료한 현재의 일상까지 자신의 삶을 이야기하고 있다. 자신의 말과 얼굴이 그려진 달력을 보며 흐뭇해 하는 어르신들과 자기가 그린 그림이 달력에 버젓이 새겨져 나온 걸 보며 뿌듯해 하는 아이들, 이 과정을 지켜보며 흡족한 미소를 짓는 기획자와 부모의 얼굴이 눈앞에 보이는 듯하다.
책방을 매개로 진행되는 일은 일일이 손에 꼽기가 벅찰 정도다. 동네 어머니들의 오카리나 동아리, '정배 한살이' 등 마을의 작은 모임에서 회의나 연습을 위한 장소로 배꼽마당을 애용하고 있다. 풍물교습과 요가도 함께 진행했는데, 요가의 경우 아무래도 책방 공간만으로 비좁은지라 인근의 보건소 공간을 빌려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배꼽마당은 종종 주민들의 영화관이 되기도 한다. 어린이에게는 주로 애니메이션이, 어른을 위해서는 좀 더 진지한 작품이 준비된다. 영화관을 매개로 이웃 마을 사람들을 초대하는 것을 넘어 이제는 아예 옆 마을에 가서 상영회를 할까도 생각하고 있다. 이 밖에도 아이들과 함께하는 사진과 미술교실 등이 꾸준히 열린다. 작년에는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의 지원을 받아 마을 연극을 준비해 공연을 올렸다. 마을 이야기를 주제로 한 <솥비마을 사람들>이라는 작품이었다. 이후에도 연극팀은 대학로로 단체 공연관람을 가는 등 활동을 계속 유지해 오고 있다.
책방은 아이들을 함께 키우는 장소이기도 하다. 이제는 어지간히 익숙해진 아프리카의 속담을 재차 상기하자. '한 명의 아이를 기르는 데 하나의 마을이 필요하다.' 책방은 아이를 함께 기르는 거점의 역할을 충분히 수행해 내고 있다. 아이들이 스스럼없이 와 머물다 가는 공간. 재미있는 일이 언제든 벌어지는 공간. 친구들을 만날 수 있는 공간. 친밀한 어른들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공간.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책과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공간. 잠시 머물러도 좋고, 오래도록 시간을 보내도 좋은 공간.
물론, 책방이 아이들에게만 맘 편한 곳은 아니다. 책방 지기들은 동네 사랑방지기를 자임하고 나섰다. 일하러 나온 동네 주민에게 물 한 잔, 차 한 잔, 때로는 막걸리 한 잔을 권하다 보면 어르신들은 각종 주전부리와 농산물로 되갚아 주신다. 당연하게도 먹거리만 오가는 것은 아니다. 너나 할 것 없이 한마을 주민이라는 소속감과 사람살이의 구수한 정이 따라붙었다. 책방이라는 작은 공간이 특별할 것 없는 마을의 일상에 색다른 리듬감을 부여해 주는 계기를 만들어준 것이다.
책방 앞에는 정배분교 학생들이 만들어 심은 간판이 있다. 어쩌면 저리도 정감 어린 문구를 뽑아냈을까. 간판의 문구는 배꼽마당의 지향을 깜찍한 어휘들로 짚어낸다. '우리 몸 한 가운데 배꼽, 정배리 한 가운데 배꼽마당', '없는 책 빼고 모두 다 있는 배꼽마당', '하하호호 배꼽 빠지는 도서관', '쉼터 마을 사랑방' 등 배꼽마당에 대한 애정이 문구에 가득하다. |
우리 마을 문화공간, 내 손으로 가꾼다 |
배꼽마당을 비롯한 경기도 내 내일책방은 얼마 후면 개관 2주년을 맞는다. '별도의 예산도, 전담인력도 없이 컨테이너 두 동과 약간의 책만으로 공동체와 잘 만날 수 있을까?'라는 최초의 불안감은 이제 서서히 안도감을 지나 자신감으로 건너가는 중이다. 공동체와 만나는 일이 많이 편해졌고, 점점 더 확장되어 갈 수 있으리라는 확신이 생기는 까닭이다. 배꼽마당은 작년부터 입구에 번호 자물쇠를 달았다. 운영자가 있는 시간만이 아니라 마을 구성원이 원하는 시간 언제나 책방을 사용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책방이 특정인의 전유물이 아니라 마을의 공유 재산이라는 것을 확실히 한 셈이다.
내일책방의 가장 큰 특징이자 성공 요인은 지역 주민이 직접 운영자가 되었다는 점이다. 기획자나 작가들이 빠지면 흐지부지되는 다른 프로젝트와 뚜렷하게 차별되는 점이다. 마을 사람들이 운영을 맡고 있으니 문턱도 훨씬 낮출 수 있고 주민에게 다가가기도 한층 손쉬웠다. 한 명민한 예술가의 작업과 이를 실현하기 위한 공공기관의 노력, 지역별 책방 운영자들의 자발성, 다양한 관계망을 형성하며 책방을 넉넉하게 품어준 마을 공동체의 합작으로 내일을 여는 책방이 꾸려졌다. 고작 컨테이너 두 동이 마을 공동체 활동의 구심점이 되고 있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고무적이다. 내일책방은 이미 상당수 지자체의 벤치마킹 대상이 되고 있다. 2년 동안 배꼽마당을 비롯해 각 지역의 내일책방을 찾아 온 공무원 단체도 여럿 된다. 많은 예산을 필요로 하지 않으면서도 주민들의 문화적 활동을 진작시킬 수 있는 거점이 된다는 면에서 지자체가 관심을 갖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아이들의 놀이터이자 배움의 장소로서, 주민들의 어울림과 모임장소로서, 공동체의 다양한 활동이 만들어지고 성장하는 산실로서 배꼽마당은 이제 정배리에서 없어서는 안 될 공간이 되었다. 책방은 공동체 구성원의 관심을 먹고 자라고, 공동체 구성원의 관계는 책방을 매개로 성장한다. 내일책방, 그리고 정배리 배꼽마당은 책을 매개로, 주민이 중심이 되어, 건강한 공동체를 일구어내는 것이 충분히 가능하다는 사실을 매력적으로 증명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