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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혼의 이사
박정옥
2012.06.29
5046
안산공단의 한 직장에서 정년까지 일한 남편은 심한 스트레스로 위장병과 불면증을 달고 살았다. 남편은 이제 남 밑에서 밥 빌어먹는 일은 하지 않겠다며 빈둥빈둥 놀았다. 나는 꽃다발과 케이크를 준비해 정년퇴임식을 해준 다음 그동안 수고 많았다며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내버려두었다.
두어 달 놀았을까? 남편의 위장병과 불면증이 다시 도졌다. 시계 초침 소리에 잠 못 이루고, 밥은커녕 죽도 못 먹고 신트림만 계속했다. 앞으로 어떻게 사나 하는 걱정과 아직 취업하지 못한 막내딸 때문에 부담이 컸던 모양이다. 급기야 남편은 집을 떠났다. 가족 부양에 대한 부담과 스트레스에서 벗어나려면 차라리 안보는 게 낫다고 판단한 것이었다.
어디를 가든 잘 자고, 잘 먹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그의 가출을 쉽게 허락했다. 살아 있노라고 가끔 연락만 하라면서 남편의 짐을 꾸렸다. 약간의 현금과 카드도 가방 깊숙이 찔러넣었다.
모두 말했다. 어찌 그렇게 담담히 보낼 수 있느냐고.
“잠 못 자고, 밥도 죽도 못 먹는 남자와 한번 살아봐라. 옆에서 나만 잘 자고 먹을 수 있는가? 나도 살아야지!”
내 대답이었다. 그렇게 별거가 시작되었다. 가끔 남편에게서 문자메시지가 왔다.
“나 잘 지내. 걱정하지 마. 별일 없지?”
나는 답장을 보냈다.
“별일 없어요. 잘 지낸다니 다행이군요.”
남편이 나간 뒤 계절이 두번 바뀌었다. 어느 날 불쑥 남편이 귀가했다. 나갈 때 핼쑥했던 얼굴에 살이 조금 오른 듯했다.
“겨울옷 좀 가져가려고. 나 울진에 있어. 호텔 기숙사에서 지내. 한방 쓰는 사람 때문에 좀 불편하지만 견딜 만하고.”
그제야 알았다. 남편이 온천 호텔 관리인으로 있다는 것을. 남편은 사흘간의 휴가를 보내고 겨울옷을 챙겨 돌아갔다. “당신이 없어 외로운 것만 빼고 다 괜찮아.”라는 말만 내 마음에 깊이 들여놓고…….
그후 남편은 대여섯 차례 집을 다녀갔다. 그동안 막내딸이 취업해서 우리 부부도 짐을 덜었다. 그런데 올 봄에 남편이 자기 있는 곳 바닷가에 작은 집을 구했으니 이사오라고 했다. 고민해 보겠다고 말했으나 남편은 전화로 자주 이사 문제를 꺼내며 재촉했다. 서둘러 막내딸의 거취를 정하고 집을 내놓았다. 그러고는 지난 4월, 울진으로 이사왔다. 친구들도, 매주 손녀와 즐기던 시간도, 사계절 아름다운 공원의 풍경도 다 내려놓고 훌쩍 떠나온 것이다.
남편은 기숙사를 나와 집을 얻고 홀로 밥해 먹으며 지냈다. 안산을 떠나오기 전, 남편집을 다녀간 적 있었다. 거실에 빨랫줄을 달아 속옷을 주렁주렁 걸어놓고 불과 칼, 냄비만 있으면 먹고 사는데 지장 없다며 홀아비 냄새를 훅훅 풍겼다. 하도 추워서 삼일을 못 넘기고 돌아갔지만 싱글벙글하던 남편 얼굴을 잊을 수 없었다.
“나 밥이랑 빨래도 잘해. 여기 오면 내가 다 해줄게. 당신은 가만있어.”
그럴 리 없다는 내 예감은 이사온 지 며칠만에 맞아떨어졌지만, 활력을 되찾은 남편이 고마워서 삼십여 년간 정이 듬뿍 든 동네를 떠나 해가 떠오르는 동해 바닷가로 올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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