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역삼동에 시가 15억원짜리 재건축 아파트(전용면적 171㎡)를 보유한 한모(72)씨. 그는 요즘 추가부담금 7억원을 더 들여 조합원 아파트를 분양받을지, 아니면 15억원을 보상받고 이사를 갈지 고민 중이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입주가 시작되는 3년 뒤쯤 아파트값이 22억원(15억원+7억원) 이상 유지되기는 어려울 것 같기 때문이다.
서울 논현동에 사는 개인사업가 성모(57)씨는 지난달 말 A은행 투자상담센터를 찾았다. 논현동과 청담동에 각각 시가 50억원이 넘는 상가 건물을 갖고 있는데, 이 중 하나를 팔기 위해서다. 성씨는 “강남 부동산 시장이 예전 같지 않은 것 같아서 고심 끝에 내린 결정”이라며 “건물을 팔고 난 뒤 자금을 어떻게 굴려야 할지 아직도 고민 중”이라고 말했다.
강남의 ‘큰손’들이 움직이고 있다. 특히 ‘재산목록 1위’로 꼽았던 부동산을 처분하고 있다는 점을 들어 일각에서는 ‘부동산 강남불패’ 신화가 막을 내리는 신호로 해석하고 있다. 또한 강남 땅부자들의 새로운 투자처 향방에도 관심이 쏠리고 있다.
◇강남부자들, 강남 엑소더스 시작되나=유명 보험사 임원인 50대 초반의 강모씨. 서울 역삼동 강남역 인근의 S주상복합 아파트(142㎡)를 7억5000만원에 급매로 내놨지만 1년째 팔지 못했다. 은행에서 2억7000만원을 융자한 터라 매달 이자만 100만원이 넘는 ‘생돈’이 빠져나간다.
다국적 부동산기업 ERA코리아 장진택 이사는 “부동산 경기에 대한 비관적인 전망이 이어지면서 강북 도심보다 경기 흐름에 민감한 강남의 경우 눈치 빠른 자산가들은 이미 부동산에서 손을 뗐거나 처분하고 있는 상황”이라며 “현재로서는 매수자 우위 시장이 형성된 시점이어서 매도·매수 호가 차이로 거래가 뜸한 편”이라고 말했다.
강남 테헤란로에 입점한 증권사 및 시중은행 프라이빗 뱅킹(PB) 상담사들은 강남 부동산시장의 현주소를 체감하고 있다. 신한금융투자 명품PB센터 강남지점의 안범찬 차장은 “지난해까지만 해도 강남 자산가들이 재건축 아파트 투자에 매달렸다면 요즘은 기존 부동산 중에서 아파트부터 매각하려는 이들이 부쩍 늘었다”고 말했다. 삼성증권 테헤란지점 류남현 부장도 “상담자 대부분이 부동산을 통한 재테크가 쉽지 않다는데 동의하는 분위기”라며 “노른자위급 부동산을 빼고는 보유하거나 투자하려는 욕구가 많이 떨어진 것 같다”고 분석했다.
강남의 중대형 주택 및 경매시장은 이 같은 분위기를 잘 말해준다. 부동산 업계에 따르면 도곡동 타워팰리스와 대치동 동부센트레빌 역삼동 아이파크 등 강남의 랜드마크격인 고급 아파트들은 고점 대비 최대 5억원까지 떨어졌다. 또 잠실 롯데캐슬골드 등 경매시장에 나온 주상복합아파트도 사려는 사람이 없어 2∼3차례씩 유찰되면서 시세의 51∼64%까지 떨어진 상황이다.
◇뭉칫돈 어디로 가나=강남 큰손들은 돈 굴릴 곳이 마땅치 않다보니 파생상품이나 주가연계증권(ELS), 공모주 등 일명 ‘치고 빠지는’ 투자 스타일로 바뀌고 있다는 게 관계자들의 전언이다.
30억원 이상의 자산보유 고객을 맡고 있는 삼성증권 테헤란지점 류 부장은 “PB 입장에서도 부동산을 처분한 자산가들에게 또다시 부동산 재테크를 권유할 시점은 아니다”면서 “주로 머니마켓펀드(MMF) 등에 단기운용 중심으로, 리스크를 관리하면서 투자 적기를 노리는 이들이 많은 편”이라고 말했다. 부동산 경기 침체에다 저금리, 주가조정이 맞물린 현 시점에서는 마땅한 투자처를 찾기 힘든 상황이기 때문이다. 금융권 PB들은 특히 부동산 관련 상담은 지양하는 한편 주로 초단기 상품을 권유하는 경우가 많다. 신한금융투자의 안 차장은 “현 시장이 워낙 유동적이라 수억을 투자해도 많은 수익을 기대하기 힘든 시기”라면서 “1년 미만이나 6개월 미만, 또는 3개월짜리 CP(기업어음)를 추천하는 정도”라고 설명했다.
박재찬 김정현 기자 jeep@kmib.co.kr |